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 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나'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
자본주의에 산다는 것은 자본과 밀접한 관계에서 삶이 영위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소망하는 것들이 돈을 수단으로 해서 이뤄질 수밖에 없으며, 타인의 시선이나 자신이 타자를 보거나 그 상대에 대한 시선은 돈이 만들어준 모습에 고정되며, 평가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삶과 자본은 일체화된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모든 것이 자본이 잣대가 되어서 움직이는 듯하다. 직업을 선택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 놓일 때에도 자본이 우리의 판단에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문제는 자본에 얽매이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에서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다보니 남은 것은 허망한 것뿐이다. 설혹 남의 욕망을 욕망하다가 뭔가를 이뤄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종국에 가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자본주의에 얽매이지 않은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위의 시에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것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놓여 있다. 설혹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자본과 동떨어져 있을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한다면 먼 미래에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스스로가 다른 것에 구애 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선택한 일이라면 그 일이 아무리 어렵고 고난이 따를지라도 행하면서도 즐거울 것이다.
하이데거의 언급처럼 우리는 '피투성'의 존재들이다. 즉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닌 우연히 태어난 것이다. 다시말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해서 부끄러울 것은 없다. 그렇지만 태어났으면 자신 나름의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무엇인가를 의지적으로 해가는 것이 '기투성'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충실하게 해나가면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